늦은 밤 잠이 오지 않아
잠을 청하고자
조용히 생각이 흐르는 대로 놔두었더니
그동안 계속 신경이 쓰이던 일 하나가 생각이 났다.
정말 오래 알고 지내던 사람인데
어찌 보면 내 삶을 오랫동안 함께 해온 사람을 떠나보낸 일이 못내 마음에 남아 오늘 밤 나를 더 잠들지 못하게 하였다.
내가 정말 떠나보내는 게 맞았는지 다시 고민하며, 처음 만났던 날부터 조금씩 조금씩 어떤 일들이 있었는지,
어떤 생각을 가지게 되었고 어떤 일들이 있었는지 적어 본다.
자려고 틀어놓은 모닥불 소리가 타닥타닥 내 상념을 조용히 정리해준다.
내가 마음으로 떠나보낸 지 일 년일 된 사람은 혜수 누나다.
혜수누나를 처음 본 기억은....
어느 백화점 9층 문화센터에서 처음 보았다.
그 당시 나는 하모니카를 배우러 이 선생님 저 선생님을 거쳐 지나가던 시절이었다.
혜수 누나를 처음 보았을 때 그곳엔 나보다 나이가 많던 형 1명 그리고 서로 친해 보이는 누나 두 분, 그리고 지금은 이름은 기억나지 않는 중학생 한 명이 있었다.
그때 나를 가르쳐 주셨던 선생님은 최 선생님으로
지금 내가 부는 하모니카에 가장 큰 영향을 준 박종성 선생님의 선생님이었다.
그리고 그때 나의 나이는 혜수누나의 말에 의하면 초등학교 6학년이었다고 한다.
그 나이의 내가 본 혜수누나는 나랑 친해지기엔 너무나도 차이가 많이 나는 사람이었고, 그리고 그 누나는 항상 바빠 보였다.
아무래도 휘종이 형이 마음이 여리고 그래서인지 나는 그중에선 휘종이형이 제일 편하긴 했다.
시간이 조금씩 흐르고 혜수누나와 같이 있던 다른 누나는 안 나오시게 되었다.
내 흐린 기억 속에는 외고를 다니셨던 걸로 기억하는데, 이제 입시 준비하느라 못 나오시게 된 걸로 알고 있었다.
같이 배우던 사람이 점점 줄고 3~4 사람만 남을 무렵
나는 하모니 키즈라는 곳의 캠프를 가게 되었던 것 같다.
어린 시절의 나는 지금도 그 모습이 많이 남아 있지만,
생각보다 혼자 놀기를 좋아하고 다른 사람과 어울리는 것을 잘 못하는 아이였다.
그때 갔던 하모니카 캠프에는 8명 정도의 선생님들과 함께 총 30명 정도 캠프를 갔었던 것 같다.
하모니카를 좋아하는 아이들이 많이 모였고, 같이 팀을 짜서 악기 연주를 하기도 하고, 놀기도 하고 그랬다.
흐릿하고 흐릿한 기억 속에 계곡 근처였던 것과 계곡물에 수박을 담가 두었다가 먹었던 기억,
그리고 캠프 건물 뒤편에 작은 벤치가 있고 태양을 막아주는 불투명한 가림막이 있던 쉼터에서
표정이 인상적이었던 현기라는 아이와 어느 키가 큰 여자아이 그리고 작은 남자아이와 같이 있던 기억이 사진처럼 남아 있다.
여러 팀을 나눠 연습을 하는 시간에
나는 집중을 하지 못하는 아이였다고 한다.
지금 남아 있는 내 기억엔 우리 팀에 주어진 곡은 나에겐 너무 쉽게 느껴졌고
우리 팀은 매우 답답하게 느껴졌다.
그래서 더 잘하는, 그리고 더 재미있는 팀에 가서 같이 껴서 연습을 하곤 했다.
아니면 혼자 구석에 있던가,
그때 나와 같은 팀이었던 혜수 누나가 굉장히 말 안 듣는 애 데리고 연습하느라 고역이었다고 매번 말한다.
그때의 내가 말을 안 들었다는 건 나도 인정한다.
어린 시절의 난 어디로 튈지 모르고, 재미를 추구하고, 심심해하는 걸 못 견뎌하고, 사람들이랑 엄청 가까이하는 건 원하지 않는데,
그러면서 친한 사람들을 보면 매우 부러워하던 아이였다.
그렇게 말썽꾸러기였던 캠프가 지나간 후 나는 딱히 혜수누나와 같이 연습할 일은 많지 않았다.
최 선생님이 문화센터에서 강의를 안 하시게 되어 나는 자택으로 가서 연습을 하거나,
종성쌤에게 배우거나 하게 되었다.
시간이 흐르고 흘러서 다시.. 혜수누나와 겹쳐지게 된 것은
내가 하모니 키즈란 곳에 안 가겠다곤 하면서 연습은 꾸준히 나갔는데,
종성쌤이 임학역 쪽에 연습실을 가지게 되었을 때, 하모니 키즈 멤버들도 따라 임학 쪽으로 연습을 가게 되었다.
아직도 그때 그 멀리 갔었던 연습실 기억이 난다.
그즈음 중학생이었던 나는 구리에서 강변을 가는 버스를 타고 2호선을 타서 강남역까지 간 후 임학역을 가는 빨간 버스를 탔다.
그 연습실 근처의 돈가스 집이 돈가스가 통통하고, 샐러드가 달콤했던 기억이 난다.
종종 종성이형이 사주셨었는데,
그 임학역 연습실에서 혜수 누나와 나는 그저 그냥 연습을 가끔 같이 하는 사이 정도였다. 나에게는.
원래 나와 혜수누나는 성향이 맞는 편이 아니다.
나는 즉흥적이고, 하고 싶은 건 그때 해야 했고, 계획하지 않는 성격이었다면,
혜수 누나는 차근차근히 하나씩 해나가면서 바라는 바를 이루는 노력형인 사람이다.
나도 어딘가 불편하고, 내가 괜히 장난치면 혼낼 것 같은 느낌에 괜히 혜수누나랑은 친해질 수 없겠다 생각했다.
그리고 그 시절 임학역 연습실에는 좁지만 하모니카를 좋아하는 14~15명의 중, 고등학생들이 서로 좋아하는 연주를 하기에도 바빴다.
그 와중 나는 다른 사람들과 합을 맞추는 연주를 잘하지 못했고, 혼자 하는 독주 연주를 좋아했기에,
그리 많은 사람과 친하지 않았다.
일 년 이 년이 지나면서, 열 명이 넘었던 하모니카를 좋아하던 아이들이 각자의 사정으로 하나둘씩 사라졌다.
누구는 유학을 가게 되었고, 누구는 대학 준비하느라, 누구는 이제 자기 직업을 찾아 떠나느라, 누군가는 이제 하모니카가 내 길이다 생각하며 각자의 방향에 맞춰 흩어졌다.
그리고 나는 아직도 무슨 일이었는지도 모르고 물어볼 생각도 없지만,
서로 생각이 달라 다툼이 있던 적도 있다고 한다.
그렇게 사람들이 흩어지고 난 뒤에 남은 사람은
아무 생각 없이 그냥 하모니카 불러온 나와, 하모니카를 부는 걸 좋아하는 사람, 그리고 아직 많은 걸 생각하기에 이른 초등, 중학교 아이들이 남았다.
나는 하모니카를 직업처럼 열심히 하지 않은 사람이지만, 항상 남들보다 잘하고 싶다는 욕심은 있는 사람이었고,
진짜 하모니카를 좋아해서 열심히 하는 사람들이 사라지자, 호랑이 없는 산에 여우가 왕 노릇을 한다고,
아이들과 몇몇 남은 사람 사이에서 신나 있었다. 나에겐 일종의 어떤 책임감도 느껴지기도 했다.
모두가 잠시 떠난 이 모임을 그들이 올 때까지 잘 지키고 돌아올 때 맞아주자 같은 생각이 말이다.
그렇게 7~8명이서 연습을 하고
내 고등학교 2학년 때 하모니카 아시아 대회가 찾아왔다.
2년마다 찾아오는 아시아 대회는 2년 전에는 중국에서 했는데(4년 일 수도 있다.),
그때는 같이 나갔던 사람들 중에 두 명만이 상을 받지 못했는데, 그중 한 명이 나였다.
그때 버스에서 혼자 엉엉 울고 그랬다.
부끄럽고, 창피하고, 축하해 줄 수 없어서.
그런 마음 아픈 결과가 있었지만, 다음 싱가폴 대회 때에도 나가보고 싶었고,
팀으로도 나가고 싶었는데, 팀을 짜려면 8명 안에서 짤 수밖에 없었다.
별 선택의 여지없이 나이 많은 4명
나이가 적은 4명이 팀이 되었고,
결국에 대회에 가는 건 나이 많은 4명 팀 쪽이었다.
그 팀 안에 혜수 누나가 있었고, 그때 같이 연습하며 많이 친해졌던 것 같다.
서로 의지하고
하모니카 아시아 대회를 가기 전 6개월 정도는 준비해서 갔던 것 같다.
나는 하모니카를 하면서 처음으로 합주의 1파트 자리를 맡아서
곡을 꾸미고, 어떻게 불 지 연구하고, 곡을 리드하게 되었고,
그것은 정말 신나는 일이었다.
내가 생각하는 대로, 내가 표현하고 싶은 대로 곡을 불고, 팀원들과 합을 맞춘다는 건 정말 최고였다.
하지만 내가 꾸미는 곡은 내 성격만큼이나 변화무쌍했고, 감정적이었고,
팀원이 합을 맞추기엔 매번 똑같지도 않아서 팀원들이 맞추기 어려워했다.
대회 준비해 가며 연습하면서, 얘기도 하고, 온도 정하고, 의견도 나누고, 서로에 대해서도 알게 되었다.
그 네 명 안에서의 나는 제일 연장자인 누나에게는 깍듯이 대하지만, 장난기는 참을 수없으며, 장난은 치지만,
진지 해야 할 때는 진지한 모습을 보여줬다고 생각한다.
정말로 그랬는지는 그들한테 물어봐야 알겠지만.
싱가폴에 가서 우리는 7일 동안 갔던 걸로 기억하는데,
5일간은 대회 일정이 있었기 때문에 따로 관광을 다닌 건 하루 정도밖에 없었다.
대회 일정을 보내며 서로 마주 보는 방을 돌아다니며
게임도 하고 얘기도 하고, 장난도 치고, 투닥거리면서 보냈다.
그리고 서로 안 맞는 부분이 힘들다고 싸우기도 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다들 15~22 살 사이의 아이들이었다.
그때의 끈끈하고 서로의 볼 것 못 볼 것 다 본 경험 이후 나는 우리 모임이 굉장히 끈끈해졌다고 느끼고
이 사람들이 소중해졌다.
나는 항상 나의 나쁜 면을 사람들이 보게 되면 떠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 있는데,
이들이 나의 그런 모습을 보고도 떠나가지 않은 첫 사람들이었다.
그 이후에도 많은 호흡을 맞춰 온 우리는 같이 연습하고 공연을 하고, 또 가끔씩 따로 만나 회포를 풀었다.
심지어 다들 하모니카를 전공으로 하지 않고 취미로 한다는 공통점도 있어 더 잘 맞았던 것 같다.
우리 모임이 소중했기에, 혜수 누나도 날 어릴 때부터 봐왔던 사람이기에 깍듯이 대했지만,
워낙 나와 누나가 다른 사람이었기에 맞지 않는 부분도 있었다.
예를 들면 꾸준히 나를 아이 다루듯이 한다던가, 한심한 장난꾸러기 취급을 한다던가, 놀기만 한다고 말하던가, 대책이 없다고 한다던가,
지금 생각해보면 하지 말아 달라고 얘기를 드렸어야 하는 얘기들을 하시곤 했다.
다른 사람들이 있는 자리에서 그런 얘기들을 하시는 게 기분이 나빴지만,
나와 스타일이 다르시니까, 소중한 누나니까, 그리고 어느 정도 맞는 말이기도 하니까,
누나가 말주변이 없어서 친한 동생을 놀리면서 다른 사람과 친해지면 우리 누나에게 좋은 거니까.
그런 생각으로 참았다. 참은 게 맞았던 것 같다.
이제 시간이 지나고 나는 누나에게 남에게 쉽게 털어놓지 못하는 얘기들도 털어놓을 정도로 의지하게 되었다.
대학에 3월이 채 5일도 남지 않은 시점에 추가 합격하여 고민해야 했을 때 바로 전화한 것도 누나였으며,
잠수 이별을 받아 힘들었을 때 얘기 들어달라고 찾아가기도 했고, 정말 나의 힘든 부분이 있을 때 생각나는 분이 되었다.
하지만 의지가 되는 것과는 달리 예전부터 쌓아왔던 게 2021년이 되자 터져 버리고 말았다.
나는 사람들을 모으려면 누군가 광대 노릇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그게 나여도 상관없다고 생각한다.
모인 사람들이 꾸준히 얼굴 보고 즐거울 수 있다면, 그리고 나의 노력을 소중한 한두 명만 알아줄 수 있다면
이제부터는 분노의 나쁜 말들이 쏟아지려고 하는데,
여러분이 충분히 가려들으셨으면 좋겠다.
혜수 누나가 나에게 사람들 모아서 모이자고 해봐라고 말하면
사람들을 모으기 위해
놀기 좋아하는 이미지를 바탕으로 놀자는 이유로 사람들을 모은다.
그러면 그렇게 모인 자리에서 혜수 누나는 애들에게
쟤는 참 놀기 좋아한단 말이야~ 그치?
누나가 모으라고 했으면서 이런 식으로 말하면 굉장히 속상하다.
또.. 누나의 졸업식 때 챙겨드리고 싶다고, 막 입간판 세워드리겠다고 현수막 세워드리겠다고 말하면
진짜 그렇게 하면 창피하다고, 올 생각도 하지 말라고, 부르지도 않을 거고 알려주지도 않을 거라고 말하신다.
나도 누나가 정말 싫어하는 건 할 생각이 없는데, 워낙 장난스러운 이미지가 있어서인지,
혹시 정말로 할까, 사고라도 칠까 걱정하시는 건 인정한다.
하지만 너무 싫어하시니 그것도 상처였다.
또 다른 건.. 차별하는 것이 느껴지는 게 싫었다.
말로는 나를 아낀다고는 하지만
항상 연락드리는 것은 나였고, 내가 어수룩하게 챙겨드리기는 하지만
아무것도 안 한 다른 동생을 엄청 챙기기도 하셨으며
이제 자취한다고 밥 사준다고, 다른 동생들은 그렇게 티가 나게 부르시면서
나를 부르지 않는 것을 느끼며 나는 점점
누나가 나를 싫어하신다고 느꼈다.
똑같이 생일을 챙겨드려도
다른 애한테는 챙겨줘서 고맙다고 그 애 생일을 챙겨주고
나한테는 고맙다고도 안 하고 이런 케이크를 사 왔냐고 한 적도 있고
정작 나는 3년 이상 누나에게 생일을 챙김 받지 못했다.
그 꼼꼼한 사람이 다른 사람 챙기는 것을 보며
아니겠지, 아니겠지 얼마나 생각했는지 모른다.
그리고 사람들이 모여 있는 자리에서 늘 그렇듯이
나로서는 험담이라고 느껴지는 걸 하시면서 대화를 이끌어가시는데
너무 듣기 싫었었다.
어릴 때 말을 안 들었었다. 장난이 심하다. 노는 거 좋아한다.
심지어 정말 의지하고 싶어 찾아갔던, 대학 합격 일이나, 잠수 이별 상담했던 얘기들을
자신을 참 곤란하게 했던 일이라며 우스운 얘기로 삼는 것을 보고
내가 감사하게 생각하고 의지했던 일을 이 사람은 귀찮게 생각했구나를 느꼈다.
어느 날
모임 자리에서 또 내 험담을 하며 대화를 하고 있는 누나에게
이제는 참지 않고 얘기를 했다.
누나, 저 싫어하죠. 왜 그런 얘기를 해요?
말문이 막히셨는지 그런 거 아니라고 얘기하셨지만,
나는 이제 딱히 더 얘기하고 싶지 않았고,
분위기를 크게 망치고 싶지 않아, 구석에서 맥주를 홀짝홀짝 마셨다.
그리고 그날 더 이상은 그 주제로 얘기가 나오진 않았다.
그렇게 내가 험하게 말을 한 이후로 두 달 넘게
모임 단톡방을 나갈까 고민을 엄청나게 했다.
내가 소중하게 여기는 사람이지만
그 사람이 나를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면
과연 이 사람은 나에게 그럴만한 가치가 있을까?
내가 하는 일들에 고마움을 느끼지 않고
오히려 불편해하는 사람이라면
내가 잘해 드릴 필요가 없는 게 아닐까?
하지만 그렇게 결정하기엔
너무 오랜 시간을 보아 왔고,
소중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나는 그 사람에게 소중한 사람이 아닌 것 같았다.
고민하고 고민하고 고민한 끝에
취업 준비한다는 이유로 누나가 있는 거의 모든 카톡방을 나갔다.
그리고 아직까지 1년 동안 먼저 누나에게 연락이 온 적은 없다.
잘한 결정인 것 같다고 스스로에게 말한다.
그래도 내가 그렇게 연락을 끊는 게 맞았을까
많이 나와 맞지 않은 사람이어서 그런 게 아닐까
연락은 원래 잘 안 하는 사람이라 그런 게 아닐까
상대방 입장에선 왜 화났는지도 말 안 하고 다짜고짜 연락이 두절됐다고 느끼는 게 아닐까
같은 생각들이
이렇게 잠 못 드는 밤이면 생각나곤 한다.
내가 오해하고 있었다고,
너를 아끼는 동생이라 생각했지만, 표현을 못했던 것 같다고 말해주면
내 마음이 풀릴 것 같아 무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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